오래전에는 좀 사는 집이라면 사랑방이 있어서 그곳에서 주인장은 과객을 맞아 오가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세상사와 부족한 지식을 채워가기도 했다. 이런 사랑방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미국에서도 워낙에 시골구석에 사는 내겐 찾아오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누군가가 그립던 차에 무술 전문 웹 사이트인 무카스(Moocas.com)에서 인터넷 공간에 사랑방 한 칸을 내 주었다. 이런 행운은 내게 과분한 일이지 않는가?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함께 무예의 길을 걷는 가슴 뜨거운 이들과 소통하길 소망하며 펜 가는 대로 칼럼을 써서 연재해 보았었다.

하드웨어(Hardware)뿐인 컴퓨터?

<태권도의 과학>이란 책이 출판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책이련만 여기저기서 관심을 가지고 봐 주신 분들께서 정말이지 과분한 격려를 보내 주셨다. 대단한 수준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아마 읽기 쉽게 쓴 덕에 그런가 보다. 제목부터가 딱딱하고 재미없을 책을 끄적거린 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태권도를 배울 땐 질문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죽도록 차라면 차고 지르라면 질렀다. 무서운 코치님의 지시에 따라가질 못할 때는 정신이 번쩍 날 정도로 엉덩이 찜질을 당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척척 알아들었다. 그런 내가 미국에 와서 ‘태권도’란 말조차도 듣도 보도 못한 어린 수련생들을 모아 놓고 ‘Tae Kwon Do’를 가르쳤다. ‘발바닥에 연기 나게 뛰어! 빨리 차! 세게 차!’ 한국물이 푹 들어 있었던 나로서는 이 단순한 지시조차 따라오지 못하는 수련생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얘들이 안 맞아 봐서 그런가 보다 하고 죽도로 한 대씩 딱! 딱! 하고 패주기도 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부모들을 뒤로 한 채. 워낙에 무식하고 당당했던 태도 때문이었는지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미쳤지!’ 미국서 이건 심각한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어쩌다가 손이라도 들고 못하겠다고 하면 ‘이런 건방진, 하라면 할 일이지! 말대꾸?’ 눈을 부릅뜨면 슬그머니 손이 내려갔다.
한국에서 고작해야 열 명 남짓의 선수들을 한 명의 코치가 전담해서 가르치던 소수정예 훈련만 받아온 내가 태권도 구경도 못해본 수련생들을 그것도 서로 다른 연령대의 아이들이며 청소년들을 섞어 20-30명씩 한꺼번에 가르치려니 부딪히는 것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어는 짧아 의사소통은 안 되고. 느려터지고 의지까지 박약해만 보이는 수련생들은 속 터지게 맘에 안 들었다.
미국에서도 엘리트 선수들은 소수 정예그룹에 들어가서 한국 이상 박 터지게 훈련한다. 훈련 중에 체력이 달려 토하거나 눈이 뒤집어지고 쓰러지는 것은 다반사다. 그렇지만 누구 하나 눈 하나 까딱 안 한다. 악을 쓰며 선수들을 구박하는 코치는 때리지만 않을 뿐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도 않는다. 선수들은 이 소수 엘리트 그룹에 속해있다는 자부심과 쫓겨날 때의 불명예를 두려워해 눈물을 머금고 군소리 없이 혹독한 훈련을 다 소화해 낸다. 그런 엘리트들도 아니고 재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맹꽁이들을 가르치려니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울상이 된 한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범님 실망시켜 드리고 싶진 않지만 정말 어떻게 해야 사범님 말씀처럼 세게, 빠르게 찰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진심이었다. ‘어떻게?’ 갑자기 막막했다. ‘그야, 뭐. 새벽에 일어나 계단 뛰기도 열심히 하고, 다리에 자전거 튜브 매고 발차기도 하면.......’ 원리와 방법을 묻는 학생에게 “그냥 힘줘서 세게 차면 돼.” 이것은 답이 아니었다. 
만약 같은 질문을 수영코치에게 물었다고 생각을 해보자. 어떻게 해야 빨리 헤엄을 칠 수 있을까? “그냥 빨리 팔다리 휘저어!” 그러고도 훌륭한 코치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육상 코치라면 어떨까? 어떻게 해야 빨리 달릴 수 있는가? “잔말 말고 죽도록 뛰어, 그럼 돼!” 이런 코치를 어떻게 믿고 따라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게 바로 내가 수련생들에게 하고 있던 짓이었다. 건강한 신체와 스트레스 해소 정도를 목적으로 수련을 하는 수련생들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이 길이 자기의 인생이 된 지도자라면 이런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무예에 있어서만큼은 수련생들에게 있어서 우리 지도자들은 정말 스마트한 컴퓨터 같은 존재들이다. 무엇을 묻던 착착 답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패하지 않는 천하무적이라 생각한다. 그 만큼 우리를 믿는다. 그런데 지금껏 우린 컴퓨터의 하드웨어 격인 육체의 단련을 위해선 정말이지 누구 못지않게 심장이 터지도록 열심히 수련했었다. 그런데 정작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격인 무술 전반에 대한 원리와 제반지식은 머리가 터져라 쌓지를 못했다. 하룻밤 자고 나면 새로운 소프트웨어와 애플리케이션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이다. 하드웨어에만 힘을 써서는 안 되는 시대이다. 더 성능 좋은 소프트웨어를 속속 갖추어야 한다. 즉, 우리가 수련하는 무예에 대한 해박한 지식, 단순명료하면서도 과학적인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불가(佛家)에서 내려오는 재미있는 선문답 중 하나가 생각이 난다. 평생 도를 닦으며, 진리를 찾아 헤매던 선승(禪僧) 하나가 있었다. 정말 목숨보다 간절하게 도를 깨닫고 싶어 경전도 많이 읽고 수행도 식음을 전폐하고 할 정도였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한 고명한 선사(禪師)에 대해 듣게 되었다. 천 리가 멀다 않고 한걸음에 달려가 자기가 애타게 찾던 절대적 진리에 대해 물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질문을 받은 선사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손가락 하나를 치켜 올려 보였다. 그 순간 질문을 한 선승은 화들짝 놀라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연신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절을 하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물러났다고 한다.
제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스승의 위치가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의 전문분야인 무예에 있어서는 어떤 질문에도 간단명료하면서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도장 경영방식이나 도장 관리 프로그램에 대해선 눈에 불을 켜고 공부를 하지만, 정작 우리가 가르치는 무술에 대한 핵심 소프트웨어 격인 무술 원리에 관한 지식에 대해선 공부를 갖추지 않는다는 것은 겉만 번지르르 하고 속은 텅 빈 선물상자와 같지 아니하겠는가? 
그래서 아주 오래전 내가 대답 못했던 그 여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태권도의 과학>을 집필했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은 시집가고 없는 여학생이지만 나중에라도 이 책을 보게 되면 우리 사범님이 당시에는 영어가 짧아 대답을 제대로 못한 것 이었구나 하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또한 나와 같이 무예의 길을 걷는 후배들이 나와 같이 무식하게 배우고 가르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한 것이기도 하다.
태권도는 과학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기술체계를 갖춘 무예이다. 아니 사실 모든 무예들이 그렇다. 인류의 무예는 아주 오래전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돌과 몽둥이를 들고 싸웠던 창칼을 들고 싸웠던 인류역사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로든 무예가 존재하지 않았던 부족이나 시대는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생존을 위해 자연과 이웃 부족들과의 투쟁 속에서 그 기술들을 하나씩 발전시켜갔던 것이다.
이처럼 무예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문화유산이며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투쟁의 기법들을 확실한 검증(전투와 투쟁)을 통해 발전시켜 나간 가장 오래된 인류의 행동 양식일 것이다. 이젠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걸고 발전시킨 이 인류 문화의 보고(寶庫)인 무예를 모두가 다 아는 과학이라는 안목으로 정리하고 가르칠 줄도 알아야 할 때이다.
<태권도의 과학>에서 밝혔듯이 팔이 긴 고대의 투석기나 21세기 최고의 기술로 만든 저격용 총의 원리는 똑같다. 원리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문일지십(聞一知十). 하나를 들으면 열을 미루어 안다! 이것은 사물의 원리를 간파해 지식을 얻는 방법이고 똑똑한 이들을 만들어 내려는 교육의 목적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문일지십후(聞一知十後) 용사만배(用事萬倍)라. 한 가지 무예의 원리를 이해해서 열 가지를 알고 나면 그 사용처는 만 배에 해당한다! 난 비록 부족하여 한 가지를 얻어듣고 열 가지를 나열한 책을 썼지만, 작금의 무예 지도자들은 분명 나보다 지혜로운 이들이다. 그러니 이 책을 읽어 열 가지를 알고 나면 그 사용처가 만 배가 돼야 하지 않겠는가? 동료 지도자들이 귀한 시간 짬을 내어 이 책을 읽어 준다면 더 없는 영광이 되겠다.  

스승과 제자, 사범과 도장

우선 이 질문에 대답부터 해보자. 학생의 반대말이 뭘까? 선생일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의 반대말은? 당연히 스승 아니겠나? 주위에서 자신이 가르친 학생을 언급할 때 ‘응, 내 제자일세.’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종종 본다. 지금껏 키워낸 제자가 수 천 이라는 말을 들으면 입이 떡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 내게 ‘제자가 얼마나 되나?’ 라고 물으시면 아직 하나도 키워내지 못했다고 대답한다. 그럼 쟤들은 뭐냐고 물으시면 그냥 저희 학생이고 수련생들이라고, 함께 태권도를 배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을 한다.
학생과 제자가 다르고 선생과 스승이 다르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제자라 하면 스승의 가르침을 삶의 근간으로 삼아 스승의 길을 따라 살아가려는 사람이 아닐까? 만일 정말 내가 스승이 되었다면 내 제자는 아마 나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내게 기대며, 일생을 다해 스승의 길인 태권도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내가 삶으로 보여준 가르침을 묵묵히 지켜 나가며 나의 가르침을 다음 세대로 전하는 또 다른 스승이 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나를 보고 태권도의 길을 걸어 일생을 태권도 수련에 받치겠다고 털고 일어선 이들이 없으니 아직 스승이 되진 못한 것이다. 몇 명은 그러겠노라고 굳은 결심을 보이기도 했었지만 얼마 못가 제 풀에 지쳐 사라지고 말았다. 그만큼 내가 아직 삶으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스승과 제자들이 있을까? 많은 이들의 우려처럼 오늘의 강단에서는 ‘학생은 있되 제자는 없고, 선생은 있되 스승은 없는’ 현상들이 숱하게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교권이 땅에 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스승이 없는 것도 돌아 볼 문제다. 나 자신도 학창시절 선생님들 중에 스승이라고 느껴지는 분들은 별로 없었다. 대신 사회에 나와 가르침을 얻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우러러 스승으로 모시는 분들은 계신다.
정통성을 따지는 무술유파에서는 학생과 제자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가르침에도 ‘학생용’이 있고 ‘제자용’이 따로 있다. 보통 내제자(內弟子), 혹은 입실제자(入室弟子)라 불리는 이들은 스승을 가까이서 친견하며 특별한 수행과 지도를 받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수제자를 따로 뽑아 배사(拜師)라 하여 돌아가신 선대의 스승의 위패에 절하게 한다. 이 예식을 통해 선대의 스승을 뵙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 그 유파의 법통이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무술전통에서 학생과 제자는 그만큼 다르다.
또 하나 생각해 보고 싶은 말은 사범과 관장이라는 말이다. 국기원 사범과정을 마치고 미국에 건너 왔으니 사범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모두들 나를 마스터 리(Master Lee)라고 불러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어로 마스터(Master)는 한 기예의 달인 혹은 대가(大家)를 뜻하는 단어였다. 난 태권도의 달인이나 대가가 못된다. 그래서 영어를 알고 나니 Master란 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져 행동이 신중해졌다. 나를 Master로 인정하고 불러주는 이들에게 혹여 이름값도 못 할까 전전긍긍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관장님이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라고 한다. 우리말로 표현을 다시 한다면 아마 대사(大師)님 정도가 될 것 같다. 스승도 보통 스승이 아닌 큰 스승이라는 말이다. 청도관, 무덕관, 지도관 등등. 예전 태권도 모체관들이 있을 때 각 문파의 가장 웃어른을 관장님이라고 칭했다. 그 땐 정말 관장님이라면 대사님 급이셨다.
미국에선 보통 7단 이하는 사범이라고 호칭하고 8단 이상인 경우에 관장님이란 호칭으로 예우를 해드린다. 그런데도 8, 9단씩 되시고 정말 숱한 제자들을 거느리신 관장님들이 공식석상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000 사범입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시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자신의 본분은 사범이라고 겸손해 하시는 것을 보면 그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러워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나는 나이도 많지 않고 8단도 못되었으니 미국선 당연 그냥 사범이다. 하루는 도장에 전화가 걸려 왔다. '헬로(Hello)?' 했더니 다짜고짜 한국말로 ‘관장님 좀 바꿔 달라’고 했다. 어떨 결에 ‘저~, 도장에 관장님은 안계신데 무슨 일이신지요?’ 관장님이 안계시다니 용건도 말하지 않고 끊었다. ‘싱겁긴.’ 그 뒤로도 몇 번 더 전화가 와서 관장님을 자꾸 찾길래 실례지만 관장님은 안계시고 제가 사범인데 혹시 전하실 말씀 있으시면 나중에 관장님 계실 때(?) 전해 드리겠다고 했다.
사범하고는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끊던 사람이 지쳤는지. 무슨 무술용품 회사인데 거래 좀 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관장님 오시면 꼭 좀 전해달라고 전화번호를 남기기에 알겠다고 하곤 전화를 끊었다. 우리 도장엔 아직 관장님이 안계시니 거래를 하고 싶어도 못했다. 게다가 일개 사범이라고 무시하다니!
그런데 한국에선 도장을 ‘00체육관’이라고 많이 불러서 그런지 체육관을 직접 경영하면 ‘체육관의 장(長)’이라는 의미로 관장님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는 20대의 ‘관장님’들도 여럿 계신가 보다. 30대가 되도록 자기 도장이 없으신 분들은 ‘사범님’으로 불릴 수밖에. 경륜에 상관없이 체육관 소유 여부에 따라 존칭이 바뀌는 것은 현대판 신분제도 같아 보여 별로 반갑지가 않다.
사범(師範)이란 남의 본보기가 될 만한 스승이라는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뜻이 이미 담겨 있다. 그러니 사범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는 호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도자들끼리 만큼은 서로 사범이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애용했으면 좋겠다.
또 하나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난 왜 사람들이 태권도장을 체육관이라 부르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전적인 의미에서 도장(道場)은 ‘무술의 기예를 닦는 곳’을 뜻한다. 불가(佛家)에선 절을 ‘도를 닦는 장소’라는 의미로 도량(道場, 도장과 똑같이 쓰지만 읽는 음이 다르다.)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 어느 모로 보나 도장이라는 말은 체육관(體育館: 실내에서 경기를 할 수 있는 장소, 혹은 운동 실기와 이론을 가르치는 곳)라는 말보다 의미가 깊다.
미국서 헬스클럽이나 체조 교습소 등은 체육관이란 뜻의 짐내지움(Gymnasium)을 줄여 ’짐(Gym)'이라고 부른다. 이런 곳은 엄연히 손님이 왕이다. 손님들이 바라는 것을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도장은 엄연히 사범이 왕이다. 사범이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친다. 학생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 여긴 짐(Gym)이 아니고 난 트레이너가 아니라 사범이니까. 기합도 주고, 핀잔도 주면서 가끔은 말 안 듣는 손님(?)들에게 ‘강짜’도 부린다. ‘하기 싫으면 나가!’ 체육관 같은데서 그러면 손님 떨어지고 큰일 날 일이지만 도장에선 사범님 말씀이 옳다. 버릇없는 녀석들 바르게 잡느라고 그렇다고 이해해 준다. 그러니 굳이 사범이 자기 자세를 낮출 필요가 없다.
건강을 위해선 쉽고 재밌는 좋은 운동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도장에 올까? 미국서 도장은 짐(Gym)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운동을 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부족한 자기절제와 수양을 배우러 가는 곳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웬만해선 영어가 짧아 어눌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범의 지도일지라도 잘 따라온다. 한국도 정말 도장을 몸과 마음을 바루어 잡고 심신수련을 통해 인간을 완성시키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체육관이라는 이름부터 도장으로 다시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또 태권도를 운동이라고 부르는 말도 내겐 별로 달갑지 않다. 태권도인이라면 태권이라는 수단을 통해 기예를 익혀 심신을 단련하고 수양하는 도인(道人)이 아닌가? 그런데도 태권도를 했다고 하면, 기껏 팔다리나 놀려 운동이나 한 사람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맘에 안 든다.
운동선수의 최종 목적은 역시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다. 인간성 운운 해봐야 별 소용없고 경기에서 이기면 그만이다. 필요하다면 심판한테 침 튀기며 손가락질도 좀 하고 선수들끼리 주먹다짐도 불사한다. 그래서라도 이겨야 몸값이 올라간다. 한참 주가를 올린 땐 즐겁지만 전성기가 끝나면 서글픈 신세가 된다. 나이 먹으면 신참들이 선배들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퇴역한 운동선수는 코치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면 그나마 갈 곳도 없다.
하지만 무인(武人)은 어떤가? 늙은이 취급 받으며 신참들에게 밀려 구석으로 쫓겨나는 운명인가? 아니다. 경륜과 지혜를 인정받아 제자들의 존경을 받는 스승이 된다. 제자들에게 원만한 삶의 나무그늘을 드리워 주는 스승이 된다. 경기장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보다 하루하루 자신을 다듬어 가며 세월과 더불어 성숙해 가는, 남을 이기기보다 자신을 이기길 소망해 가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무예의 길이 아니던가?
그래서 난 항상 운동이라는 말과 태권도라는 말을 구분해 사용해 왔다. 누가 운동 했냐고 물으면 ‘태권도는 했지만 운동은 못 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사실 난 운동을 참 못했다.. 학창시절 체육 실기점수는 항상 바닥이었고, 군대에선 축구를 못해 고문관 취급을 당했으며 지금도 공원에 나가 혼자 공놀이라도 할라치면 주위에서 애처로운 시선이 느껴진다. ‘저 사람 무슨 장애가 있나봐. 불쌍해......’
난 태권도는 좋아했지만 운동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소질도 없고 안 해 본 일을 할 때 어리 버리 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런 시선에 신경 끈 지 아주 오래되었다. 스포츠 중계도 4년에 한 번 월드컵축구 한국전만 본다. 그나마 선수 이름도 잘 모른다. 그냥 열광할 뿐이다. 스포츠 천국인 미국서 ESPN 채널 없이도 잘 산다. 일 년 중 미국 사람들이 가장 열광한다는 슈퍼볼 선데이가 되면 차라리 일기예보 채널을 튼다. 해도 너무하다는 말도 듣지만 나에겐 관심 가는 일이 아니라 눈총을 받으면서도 고치질 못하고 있다.
대신 무예에 관한 얘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게거품을 물고 침을 튀기며 밤을 샌다. 우리 집에 다녀가신 무인들 치고 밤 안 새고 입술 부르트지 않고 가신 분이 거의 없다.
태권도와 더불어 모든 무예는 운동의 개념을 뛰어 넘어서야 한다. 몸을 닦는 술(術)의 단계를 넘어 마음을 닦는 도(道)의 단계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전 큰 뜻을 품고 천하를 주유하던 공자님께 제자들이 누군가 정치를 맞기시면 무엇부터 하시겠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공자님은 두 말 않고 이름부터 바로 잡겠다고 했다. 직책이든 관직이든 이름부터 바로 잡아야 그 권위가 서고, 하고자 하는 목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 만큼 이름, 명칭은 중요하다. 스승, 제자, 사범, 도장, 무예, 무인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들인가! 
체육관에서 학생들을 모아 놓고 운동을 가르치는 코치가 될 것인가? 도장에서 무예를 통해 심신을 수양시키고 인격을 도야시켜 제자들을 길러내는 스승이 될 것인가? 이런 선택은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들의 신중한 선택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