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메이퀸’ 미인대회 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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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여자대학교에서는 개교기념일을 맞이한 5월31일 눈부신 원색의 파라솔을 든 수많은 아가씨들이 타원형을 그리며 늘어선 한복판에 금년의 메이퀸이 앉을 의자가 마련되고, 시녀를 거느린 5월의 여왕으로 뽑힌 한 여대생이 올라섰다. 울려퍼지는 박수소리, 그리고 여왕의 머리 위에 씌어지는 진주의 왕관, 또한 멋들어진 원무들 그리고 다채로운 잔치가 계속되었다.”

 

   1958년 5월30일 이화여대에서 열린 메이퀸 행사를 전하는 대한뉴스 166호의 내용이다. ‘메이퀸(May Queen)’이란 영어 이름과 달리 한복을 입은 여왕의 모습이 이채롭다. 당시만해도 대학 행사나 축제는 장안의 구경거리여서 운동장 주변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다.

 

   미인대회의 효시였던 이화여대의 메이퀸 선발대회는 1908년 5월31일 처음 열렸다. 처음에는 단순한 미인대회가 아니었다. 외모 뿐 아니라 재능과 실력까지 골고루 갖춰야 선발될 수 있었다.  초대 메이퀸은 이화여대 창설자다. 시간이 흐를수록 메이퀸은 외모 중심으로 흐른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준(準) 메이퀸이 얼굴은 더 예쁘다는 속설도 그래서 나왔다.

 

   4.19혁명으로 시작된 1960년 대학가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주장은 자유로웠고 목소리는 높았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같은 당시로선 충격적인 통일운동 구호도 등장했다.

 

   대학 문화도 활기차고 대담했다. 남녀 학생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만나는 ‘쌍쌍파티’는 대학생의 특권이자 낭만의 상징이었다. 1961년 11월 개국한 최초의 민영방송 HLKV의 첫 공개 방송 이름이 ‘쌍쌍파티’였을 정도다.

 

   그러나 1961년 5ㆍ16 쿠테타,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겪으면서 대학은 변했다. 학생들은 더 이상 기성세대를 믿지 않았다. 교수들을 향해 ‘비전과 지조도 없는 지식을 장송(葬送)하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 때부터 대학 문화는 대학 밖의 문화와 조금씩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하이힐을 신어야 세련된 여성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지만 여대생들은 운동화를 신기 시작했다. 서울 명동에서 초미니가 유행할 무렵 대학가에선 오히려 스커트 길이가 길어졌다.

 

70년대 대학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로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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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대학도 낭만과 저항이 혼재했다. 아니, 낭만은 곧 저항이었다.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를 단속하는 정부였기에 내 맘대로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짧게 입은 것은 곧 저항이 됐다.   젊음은 ‘청바지ㆍ통기타ㆍ생맥주’ 자체를 즐겼지만 시대는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가수 조영남의 회고에 따르면 서울대 미대생 김민기도 티 없는 웃음소리와 한없이 곧은 결을 가진 청년일 뿐이었다. 그러나 김민기와 가수 양희은이 1971년 발표한 ‘아침이슬’은 저항의 노래가 됐다. ‘금지곡의 여왕’이 된 양희은은 35년 후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단순히 김민기의 노래가 내 마음에 공명을 일으켜서 부른 것인대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 위에 의식을 얹어 놓은거죠.”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된 1975년 ‘10월 유신’은 대학가를 저항의 성으로 만들고 있었다.

 

   광주민중항쟁과 함께 시작된 1980년대는 대학생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거리를 뒤덮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렸고, 학생은 전공서적을 덮고 사회과학서적을 들었다. 1970년대 대학의 필독서는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가 쓴 이 책은 ‘8억 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과 같은 그의 다른 저서와 함께 ‘반공’이라는 우상을 깨는 데 큰 몫을 했다.

 

80년대 마르크스 저서 유행… 이념 과잉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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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의 대표 서적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다. 수십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6권짜리 책은 현대사를 보는 시각에 대한 일대 전환을 이뤘다. 1980년대 대학은 마르크스 주의를 빼고 이해할 수 없는 시대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처음에는 주로 일본 번역서를 통해 은밀하게 읽히다가 ‘6.10 항쟁’을 계기로 햇빛을 보게 된다. 서울대 ‘전야’ ‘그날이 오면’. 고려대의 ‘황토’, 연세대의 ‘오늘의 책’, 건국대 앞 ‘인’ 등 사회과학 전문서점은 대학생들의 약속 장소이자 은밀한 시위 계획을 전하는 아지트로 사랑 받았다.

 

   1990년대가 되면서 대학가의 사회과학 서점은 하나둘 문을 닫는다. 대학가 서점은 고시책과 영어책이 점령했다. 1985년 연세대 신입생의 인기 교양과목 강좌는 ‘한국사’ ‘철학개론’ ‘ 서양문화사’ ‘현대 사회와 인류문제’였다.

 

   2005년 신입생의 인기 과목은 ‘자기 계발과 직업 선택’ ‘대중음악과 함께 하는 대학 생활’, ‘해리포터 마술학교’ ‘행정고시와 공직자의 길’이었다. 철학이 있던 자리에 실용서가 들어 앉았다.

 

   외환 위기의 영향이 컸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생들은 취업의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1985년 4년제 대학의 취업률은 52.1%를 기록, 전문대학 취업률(57.2%)보다 낮아졌다. 4년제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도 미래를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4년제 대학 졸업생의 취업률은 50.5%였다. 면접시험을 잘 보기 위해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대처하는 법을 익히는 ‘모욕 스터디’까지 등장했다.

 

   그래도 이들은 밝다. 외국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에 대한 공포도 없다. 아버지 세대는 “대학에서 낭만이 사라졌다”고 걱정하지만 즐기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2000년 서울대에선 과학철학연구회, 반도문학회, 한멋(민족문화) 등의 동아리가 사라지고 바운스팩토리(흑인 음악), 스누풀(수영), 몽환(마술), FIESTA(댄스) 동아리가 생겼다.

 

자료제공=한국통계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