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와 함께 하는 세상 여행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은 자기가 태어난 주(州)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그 주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이 마을에선 평생 이 마을을 안 벗어나고 살다가 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두 시간 거리 밖의 대도시인 애틀랜타도 남의 나라처럼 여기고 사는 사람들이다. 대도시의 교통체증이나 다닥다닥 붙어사는 꼴이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 뉴욕, LA, 시카고 등 대도시는 영화나 TV 속에서 볼 뿐 정작 가 볼일도 별로 없었다.
우리 도장 청소년들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다리를 놓아주고 싶었다.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여기저기 시범을 하러 다녔다. 인근 애틀랜타부터 서로는 캘리포니아, 유타, 애리조나까지 북으로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지나 캐나다 국경을 넘어 다녀오기까지 했다. 그 덕에 제 또래 친구들에 비해 세상 구경을 제법 한 셈이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 택시, 버스를 타고 다니며 미국 수련생들이 나와 아내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이 재미있었다. 영어가 짧아 말 더듬는 동양인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미국인들이란 뭔가 웃기는 장면이었다.
1995년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LA의 리틀 도쿄에서 시범을 같이 했던 영화배우 정준 관장님과 필립 리 사범님이 계신 도장이 있었다. 그 도장을 십년이 지나 우리 학생들과 견학차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이 때는 운 좋게도 필립 리 사범님이 일주일에 한 번만 가르친다는 그 날이었다. 정준 관장님과 필립 리 사범님을 다 뵐 수 있었다. 액션영화 배우가 직접 지도하는 도장이라니 학생들이 다 흥분했다. 도장을 견학하던 우리 학생들이 벽에 걸린 단체 사진 중에 내 얼굴을 찾아내었다. 저거 사범님 아니냐는 거다. 필립 리 사범님도 나를 보시더니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10년 전에 이 도장에 방문 왔다가 잠깐 시범단에 끼어 시범했던 적이 있었는데 저기 사진 구석에 끼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 드렸다. 필립 리 사범님도 한참 궁금했다고 했다. 도장 전통상 외부인의 얼굴은 도장 사진에 들어간 적이 없었는데 1995년에 영화 홍보 차 한국에 다녀오고 보니 웬 낯모르는 사람하나가 액자 한구석에 끼어 있더라고. 우리 학생들은 기쁨을 넘어 흥분의 도가니였다. 우리 사범님이 액션스타와 함께 나란히 서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다가 그 분 도장 벽에 얼굴까지 걸려 있으니 말이다. 
정준 관장님이 주연하신 영화비디오 테이프에 친필 사인까지 받아 선물로 챙겼고 즉석에서 필립 리 사범님의 수업에 초대되어 필립 리 사범님께 직접 배우는 행운도 누렸다. 역시 필립 리 사범님이셨다. 그 분의 카리스마 넘치는 실력은 수업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직접 보여주시는 발차기며 손동작들이 바람을 갈랐다. 나와 우리 학생들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영화 속의 실력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우리 사범님이 비록 시골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유명한 사람들과 커넥션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너무 행복해 했다.  
 
(나의 젊은 날의 우상이었던 영화배우 필립 리 사범님과 함께)

몇 안 되는 지원자들을 모아 한국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화려한 서울의 밤거리부터 수 천 년 역사가 배어 있는 명승지까지 전국을 관통하며 보여주자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져 공존하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범님, 한국이 작은 나라라면서요? 그런데 왜 도시가 끝이 안나요?” 끝없이 이어지는 빌딩 숲이 너무 신기했나 보다. 온돌바닥에 얼굴을 대며 “와~ 바닥이 따뜻해!”하며 놀래기도 했다. 처음엔 한국음식이 입맛에 안 맞을까봐 걱정을 했었는데 김밥, 떡복기, 오뎅, 튀김 등 분식집 메뉴들을 너무 좋아했고 길을 걸을 땐 항상 구운 오징어를 손에 들고 씹으며 다녔다. 오징어 맛에 완전 반해서 한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멀리 있는 한국 식품점까지 가서 구했다며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도장에 오기도 했다. 그걸 어떻게 먹냐며 기겁을 하는 친구들에게는 도리어 핀잔을 주었다. “이 맛있는 것도 못 먹고. 불쌍한 것들, 쯧쯧!”
이들이 보고 온 한국은 세상 최고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지닌 신비와 경이로운 태권도의 나라였다.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돌아다녔지만 가장 먼 세상 끝으로 다녀 온 시범은 다름 아닌 동네 양로원이었다. 난 양로원 시범을 자주 다녔다. 매년 시범단을 재구성하면 제일 먼저 가는 곳도 양로원이다. 양노원은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아 누구든 오면 반긴다. 단원들에게 작은 곳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겸손함을 가르칠 수 있고 태권도로 나눔을 가르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로원에 가보면 노인들이 하루 종일 오지도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창가에 붙어산다. 그러니 손자, 손녀 벌의 꼬마들과 젊은이들이 시범을 하러 왔다면 휠체어에 앉아 산소 호흡기를 차고 나오거나 아예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은 침대에 실린 채 밀려 와서 누워서 시범을 본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열심히 손발을 뻗어 시범을 하면 다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모처럼 아이들이며 젊은이들의 힘찬 기합을 들으면 없던 힘도 나시는지 주먹을 함께 불끈 쥐며 좋아하셨다. 
미국은 연세가 들면 가족들이 있어도 양로원으로 보내지는 것이 생활문화다. 처음엔 안 그랬겠지만 젊은 자손들은 세상사는 게 바빠 오던 발걸음이 점차 뜸해진다. 명절 때나 한, 두 번 간신히 찾아온다. 그나마 일, 이년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분들도 부지기수다. 자식들이 직장을 따라 다른 주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유니폼 입은 간호사들만 왔다 갔다 하는 병실 같은 방에 누워 일 년만 지나면 그리움에 지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단다. 바깥세상 사람 구경하기 힘든 이 곳은 외부와 단절된 채 오직 죽을 날만 기다리며 사는 희망이 사라진 땅이었다. 그러니 누구고 사람만 나타나면 좋아하신다. 싸구려 양로원은 냄새가 역해서 처음 간 사람은 숨쉬기도 힘들다. 온통 죽음의 회색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니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이런 곳을 가기 꺼려한다. 하지만 이 곳이야말로 인생의 의미를 바로 볼 수 있는 교육의 장이다.
시범 후엔 단원들에게 일일이 할아버지 할머니 손을 잡아 드리고 재밌으셨냐고 묻고 인사를 드리도록 했다. 그러면 노인들이 울며 감동을 받는다. 뽀얗고 귀여운 아이들이 핏기마저 가셔 차갑게 마른손을 잡아주면 한순간이나마 얼마나 행복해 하시는지 모른다. 사람이란 역시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살맛이 나는 존재인가 보다.
어떤 분들은 침대에 누운 채 산소 호흡기를 끼고 계신다. 눈빛도 맑지 못한 것이 초점을 잃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니 글썽이는 눈으로 고맙다는 표현을 하신다. 손이 차갑기 이를 데 없다. 생명의 온기가 꺼져 가는 것만 같아 안타깝다. 다들 다시 와 달라며 꽉 잡은 손을 놓지 못 한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하지만 다시 온다 한 들 뵐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가 없다. 그 분들이 기다려주질 않기 때문이다.
창가에 매달린 노인들을 뒤로하고 손을 흔들며 양로원을 나서면 아이들도 말 못할 무언가를 느끼는 것 같았다. 생기 있는 젊은이들보다 저승사자가 더 자주 다녀가는 곳. 인생의 종착역 양로원. 그곳이야말로 가깝지만 가장 먼, 잊혀 진 세상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