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가 쓸고 간 도장, 찾아온 천사들

장마가 한창이던 2010년의 어느 여름 월요일, 아침 일찍 전화 한통을 받았다. ‘도장에 홍수가 났다’는 것이었다. ‘홍수?’ 그 땐 그 말의 뜻을 잘 못 알아들었었다. 도장 뒤로 조그만 개울이 흐르긴 했지만 그걸로 홍수가 날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화를 받고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TV를 틀어 보았더니 TV에서 집중 침수지역으로 보여주는 곳이 낯이 익었다. ‘설마? 저기가?’ 도장 앞 차를 세워두던 큰 주차장엔 보트를 탄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개울의 상류에 큰 둑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100년 만에 내린 집중호우로 터져 버렸다고 했다. 그제야 서둘러 도장에 달려가 보니 ‘도장’은 ‘수영장’이 되어 버린 후였다.
물이 빠지고 들어가 본 도장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매트 바닥이며 벽이 온통 진흙투성이였고 훈련 장비들은 다 물에 젖어 쓸 수가 없었다. 우두커니 서서 도장을 바라보았다. 어디부터 뭘 손대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몇 년을 매일 매일 못질, 망치질을 해서 고쳐 이제는 쓸 만한 건물이 되었는데 그게 다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게 서 있는 내 뒤로 하나 둘씩 수련생 가족들이 모여 들었다. 수해 복구를 도우러 왔다는 것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데 나로서는 수해를 당해본 적이 없던 터라 아무런 아이디어가 없었다.
한 수련생이 매트는 물로 씻어내고 소독하면 다시 쓸 수 있지 않겠냐고 했다. 그래 매트만이라도 건지자 싶어 매트를 들어냈더니 그 밑에 깔려있던 카펫들에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퍼즐매트가 300장이 깔리는 넓이의 도장바닥의 카펫을 다 뜯어냈다. 접착제로 붙여 놓은 지 수 십년이 된 터라 떼어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떼어내고 나니 덕지덕지 붙은 접착제들을 무릎 꿇고 앉아 끌칼로 다 떼어내야 했다. 그리곤 매트와 바닥 그리고 벽을 물로 몇 번씩 씻어내고 다시 소독제를 뿌린 후 수세미로 일일이 닦아 내었다. 며칠에 거쳐 매트는 밖에다 새워 말리고 도장 바닥이며 벽은 진공청소기로 물을 빨아내었다. 그리고 다시 대형 선풍기를 돌려 말려 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데 수련생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도와주었다. 특히 몇몇 성인 수련생들은 아예 직장에 결근을 신청하고는 사나흘 씩 와서 도와주었다. 필요한 도구들도 각각 집에서 챙겨왔고 없는 것들은 자기들 돈 내고 사오기도 했다. 나야 돈 받고 태권도를 가르친 것뿐인데 이들은 정말 나를 가족으로 여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왈칵 앞을 가렸다. 저녁이 되면 손을 씻고 가는 이들의 손을 붙잡고 고맙다고 연거푸 인사를 하지만 내 마음을 다 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를 돕자고 온 사람들에게 내가 맥 빠지고 게으른 모습을 보여선 안되겠다 싶어 그들보다 배로 열심히 일했다. 무거운 것 하나라도 내가 더 나르려고 노력했다. 그 밖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간식으로 피자와 음료수를 사 날라주는 일 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식사도 아닌 것을 고맙다며 한입씩 베어 물곤 굳은 일을 마다않는 수련생들을 보니 하늘이 내게 보내주신 날개 없는 천사구나 싶었다.
수련생들 덕분에 일주일 만에 제 모습이 돌아왔고 다시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독을 하고 말리긴 했지만 이미 습기에 찌든 벽에서 곰팡이들이 마구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퀘퀘한 냄새에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할 수 없이 부랴부랴 이전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다가 일마일 쯤 떨어진 곳에 있던 오래 된 건물로 이전을 결정했다. 낡아서 도저히 그대로는 도장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달을 기한으로 두고 찬바람이 불기 전 도장을 이전할 맘을 먹었다.
건물 수리비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혼자 아침 일찍 나가 망치질, 톱질, 못질, 페인트 칠 등 온갖 일을 하다가 수업시간 맞추어 가서 태권도를 가르치고 끝나면 다시 돌아가 새벽까지 수리를 했다. 처음에 그 곳으로 도장을 이전 한다니 수련생들이 먼저 보고 와서는 과연 이런 버려진 창고 같은 건물에 도장이 될까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정확히 한 달 후 도장   안팎으로 페인트칠을 끝내자 그럭저럭 쓸 만한 곳이 되었다. 물론 크기는 홍수가 났던 도장의 반밖에 안되었지만 아기자기한 맛에 쓸 수 있겠다 싶었다. 수련생들도 한 달 만에 다 무너져가던 창고가 뚝딱 밝고 따뜻한 공간으로 바뀌자 놀랬다. ‘사범님 혼자서 이 일을 다 한 거냐? 이런 일 할 줄 아냐?’고 물었다. 내가 할 줄 아는 재주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어떤 문제고 노력을 하다보면 하나씩 풀려가게 마련이고 계속 노력을 하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그 진척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이 경험에서 생긴 것뿐이었다. 매번 서툰 목수 일을 해가며 도장을 열다 보니 내가 사범인지 건물 관리인인지 구분이 안가긴 했지만 그래도 누구의 도움만을 바라고 주저앉지만은 않았다는 게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했다.
뒤늦게 한 한인교회에서 내가 홍수를 당했음을 알고 감사하게도 수재의연금을 모아 보내 주셨었다. 하지만 이미 난 수련생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넘긴 터였기에 그 돈은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방문해 감사 인사를 드리고 염려해주신 마음과 정성은 고맙게 받을 테니 돈은 나 말고 필요한 분들께 사용해 주길 바란다며 감사헌금을 붙여 돌려 드리고 왔다.  
난 빚지고 사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얼마 벌지 못하는 돈을 아껴 내가 내야할 공과금과 집세, 자동차 할부 등을 최우선으로 갚는다. 그러다 보니 오막살이집 대출도 다 갚고 자동차 할부도 끝난 지 오래다. 벌어 놓은 돈은 하나도 없지만 대신에 빚도 제로(0)다. 내가 벌지 않은 돈은 쓰지도 않겠다는 신념 때문에 지금도 크레딧 카드 하나 없이 산다. 크레딧이란 더 많은 빚을 낼 수 있는 자격 같은 것 아닌가? 크레딧이 좋으니 더 많은 빚을 지고 그걸 갚고자 전전긍긍하는 것이 신용사회라면 난 절대 따라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려울 때 쉽게 돌려 쓴 크레딧 카드 빚 때문에 큰 고생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고 낡았지만 편안히 쉴 집과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차도 있으니 크게 돈 들일이 없다. 덕분에 2008년 미국에 경제 한파가 덮쳐 도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쓰러져 나가던 시절 나 역시 견디기 어렵긴 했지만 빚 없던 관계로 그럭저럭 견뎌내었다.
돈은 오늘을 살 필요한 만큼 벌면 만족한다. 다가올 미래와 고난을 생각해 과도히 아끼고 쌓아두려고도 않는다. 내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돈이 모든 근심과 염려를 사라지게 해줄 수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더 많은 돈은 더불어 더 많은 근심도 가져오기 때문이다.
어쨌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빚을 지면 어떻게든 갚으려 노력한다. 간간히 삶의 모퉁이마다 한 번씩 딴지를 걸며 달려드는 고난이 있긴 하지만 그 때마다 내가 배운 것은 이런 고난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은 돈보다 주위에서 가족처럼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홍수를 당했고 황망하기만 했던 내게 진정한 힘이 되어주고 도움이 되어준 우리 도장 가족들에겐 평생 갚지 못할 빚을 지었다. 자신의 삶을 쪼개어 나누어준 그 분들의 사랑을 태권도로 되갚아 주며 살고 싶다.      
                   
마스터(Master), 그 이름의 명예

어려서 읽던 전기 속의 위인들처럼 호를 하나 갖고 싶었다. 율곡 이이, 퇴계 이황 그렇게 말이다. 뭔가 뜻 깊고 멋진 나만의 이름을 갖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선 그런 생각이 없어졌다. 왜냐하면 난 이미 호가 있기 때문이다. 내 호는 사범(師範)이다.
주위 사람들 중에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항상 이 사범 혹은 Master Lee로 불려왔고 나도 그게 편했다. 나를 특정 지어 부르는 이름 아닌가. 게다가 사범이라는 말은 언제나 들어도 신선하고 분에 넘치는 호칭이다. 평생 명찰처럼 붙이고 다니며 불리 울 이름. 사범 이 정규. 난 그 이름이 너무 만족스럽다. 단지 이젠 그 이름값을 해야 된다는 부담만이 있을 뿐이다. 지나온 세월만큼 수련이 깊질 못하기 때문이다. 
세월에 녹슬지 않고 가치를 더해 가는 무인(武人). 이것이 내가 꿈꾸며 살아가는 사범의 모습이며 곧 미국인들이 상상하며 기대하는 사범의 모습인 것이다. 태권도를 통해 몸을 다스리고 삶을 다스려 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비단 기예뿐만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성숙한 인격과 덕망, 지혜를 갖춰야 한다. 사범을 존경하게 되다 보면 인생에 대해,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듣고 묻고 싶어 한다. 그러니 태권도 학과에선 교양필수과목으로 사상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뛰어난 한국의 전통사상들을 찾아 가르칠 때 한국적인 태권도 사범들이 배출될 것이고 이런 혜택은 수련생들이 누리게 될 것이다. 미국에 와 보니 정작 한국을 잘 모르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 얼마나 오늘날의 인류에 도움이 될 만한 훌륭한 문화, 역사, 사상, 기술, 지식으로 가득 찬 나라인지 정작 한국에 살면서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와서 뒤늦게나마 한국을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태권도 기술만으로 경쟁하기엔 미국이란 사회가 만만치 않다. 체력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도 더 이상 딸리지 않는다. 더욱이 우리가 미국에서 겨루어야 할 상대는 같은 태권도 사범이 아닌 별의 별 무술 실력을 다 갖춘 전 세계 무술인들이다. 더욱이 비즈니스 센스에 강한 미국 사범들과 겨루려면 그들이 갖지 못한 향취를 지닌 존재가 되어야 한다. 최고가 되려 하지 말고 유일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만나기 힘든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장 한국적일 때 가장 경쟁력이 있다. 그러니 한국적 색채와 향취가 진하게 묻어나는 사범이 되어야 한다.
  
해외 태권도 사범 우리는 누구인가?

태권도 경기장에서 수많은 미국인들과 함께 가슴에 손을 얹고 태극기를 향해 반주도 없는 애국가를 부르다 보면 울컥 뜻 모를 설움과 내 사랑 대한민국이 가슴에 사무친다. 우린 태권도 사범들이다. 우리는 단순히 무도를 가르치는 지도자임을 떠나 한국의 얼을 세계에 심는 당당한 외교관들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 뿌리내린 태권도는 한국에서 헌신하시는 사범님들과 고국을 떠나 먼 나라에서 씨앗처럼 피땀 흘려 한국을 심은 사범님들의 합작품이다.
낯설고 물 설은 남의 나라에 정착하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음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다. 이젠 웃으며 이야기하는 추억이 되었지만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고개를 가로 저을 일이다. 멀지 않은 곳에 국제사범 1호로 70년대 초에 도미하신 서 영선관장님이 계신다. 인자하신 인품 덕에 친구와 제자가 많으신 분이시다. 70세를 훌쩍 넘기신 연세에도 매일 도복을 입으시고 손수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나와 아내는 시간이 나면 도시락까지 싸들고 찾아가 태권도에 대한 지난 경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 했다. 관장님도 그런 우리 부부에게 감칠 맛 나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미국 정착 초기 다른 것을 시킬 줄 몰라 핫도그로만 끼니를 때웠다고 하셨다. 하도 먹어서 모래알 같이 씹히는 핫도그를 씹고 또 씹으면서도 당당히 태권도를 가르치셨다고 했다. 쉬는 날이면 차를 몰고 멀리 강변에 나가 코펠에 끓인 된장국을 떠먹으며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가슴 아픈 감상을 일으키게 한다. 나도 조금은 맛본 일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만만히 보고 왔던 미국이었는데 와 보니 사정이 그게 아니었다고 하셨다. 워낙에 차이 나는 신장의 열세와 덩치에서 오는 막강한 파워를 이겨내기 위해 도리어 새벽과 밤으로 비 오듯 땀 흘리며 남모르게 훈련을 해야 했었다고 하셨다. 50갤론(10바스켓)의 땀을 흘려야 비로소 블랙벨트라는 구호로 거구의 제자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며 함께 뛰셨다고 한다. 미국에 태권도를 닦아 놓으신 선배 관장님들의 실력의 근원은 수백 만 번에 이르는 반복과 단련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근육질의 거구들이 하루아침에 따라 올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이분들이 보여주신 칼바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는 예리하게 맺고 끊는 동작들. 체격과 상관없이 누구의 도전이던 OK!를 외치던 당당함. 이것들이 오늘의 미국 태권도를 있게 한 밑거름이었다.

세상을 향해 깔린 인프라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서로의 애경사를 챙겨가며 시간만 나면 함께 어울려 식사도 하고 친목을 나누기를 좋아하는 정이 깊은 사람들이다. 그러다보니 어떨 땐 미국 속의 한국을 만들고 그 안에 안주하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미국인 친구 하나 없이 살기도 한다. 사업상 만나는 관계는 있어도 개인적으로 미국인 친구를 두고 서로 오가며 살아가는 한인 1세들은 많지 않다. 미국에 왔다고 다 미국을 사는 것은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큰 도시엔 한인 타운이 형성되고 한인들끼리 비즈니스 매매, 주택매매, 보험, 법률, 식료품 구입, 자동차 구입 등 모든 활동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어 못해도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으니 한인들로 형성된 섬을 만들고 그 섬 안에 안주하기도 한다. 
한인들의 사업형태도 한인 타운에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제외하고 미국 고객들을 상대하는 직종들은 사실 그리 좋은 직종들이 아니다. 아직도 많은 한인들이 흑인촌이라 불리는 빈민가에서 식료품점을 운영하거나 가발이나 헤어제품을 파는 상점을 많이 한다. 그 밖에는 세탁소, 주류 판매, 구두수선, 옷 수선, 청소용역, 샌드위치 가게, 튀김가게 등을 주로 운영한다.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하지만 미국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나 사회적인 커넥션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나마 높은 교육수준을 갖춘 한인 변호사이나 의사들 역시 한인 타운 인근에서 한인들을 주 고객층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많다. 주류 사회에 진출했다는 것은 미국인들과 섞여 살며 당당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한인1세들 중 미국 주류(主流)사회에 진출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그러면 우리 태권도 사범들은 어떤가? 태권도 사범들이야말로 한인들 중 제일 미국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한인들 중 미국 사람들에게 깊이 허리 숙인 인사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정답은 ‘거의 없다.’이다.
가끔 도장을 찾아오는 한인들은 그런 우리의 당당함을 보고 놀라기도 한다. 당당히 태극기를 걸어 놓고 사업을 하며 매 수업 전후에 미국인들이 태극기에 경의를 표 한다. 한국말 구령에 한국 예법을 가르치고 큰 절을 받기도 한다. 수련생들의 도복이나 벨트에 한글로 이름을 써주면 더 없이 좋아한다. 승단심사를 보고 나면 한글로 몸에 ‘유단자’ 혹은 ‘태권도’ 등의 문신을 새기는 이들도 있다. 그것도 사범님 친필로 말이다!
미국인들과 개인적인 친분도 스스럼없이 가진다. 함께 골프를 치거나 여가를 즐기고 여행을 가기도 하며 서로의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애경사를 함께 챙기고 정신적인 동반자 내지 스승으로 살아간다. 게다가 지역사회에 참여도가 높고 학생들이 바르게 살도록 심신 수양과 인격수양에 힘을 쓰기 때문에 보통은 ‘교육자’로 통한다. 그러니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이야말로 미국 주류 사회에 진출해서 남 눈치 안보고 당당히 살아가는 최고의 직업이 아니겠는가.
이들은 미국에 깔린 대한민국 인적자원이다. 미국 속 깊숙이 활동하는 거미줄처럼 잘 짜여 진 망(網)을 가진 알찬 인프라다. 태권도 사범들과 연계하여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 각 분야에서 큰 혜택을 보았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미국 속에 한국을 심고 건설하기 위해선 이 인프라와 인적자원들을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태권도 사범 우리는 죽어도 살아도 대한민국을 잊지 않는 가장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이기 때문이다.   

징검다리 개척자(pathfinder)

철없던 내가 미국이라는 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좌충우돌 달려온 16년. 변변치도 못한 삶에 크고 작은 일들을 겪어왔다. 난 싸워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곳이 미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많지도 않은 나이에 골병만 여기저기 들고 말았다. 자격지심에 객기를 부리다 얻은 상처들이었고 스스로를 낮추지 못해 겪었던 일들이다. 부딪힐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최상의 호신술이고 미소와 사랑으로 다가가 친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호신술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처음 미국에 정착하려 했을 땐 별별 거치는 것이 많았고 사건, 사고도 많았었는데 지금은 대충 사람들 틈에 섞여 사는 일에 익숙해 지다보니 조용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삶이 평온해졌지만 그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요즘은 세상에서 내가 지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뚜렷하게 이루어 놓은 일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16년이란 시간을 미국에서 별 볼일 없이 소모하고 있는 동안 대한한국은 어마어마한 고난과 도전의 파도들을 꿋꿋이 헤쳐 나오며 깊은 내공을 갖추어 왔다. 난 내 조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온 국민이 세계 어느 민족, 어느 백성들이 따라오기 힘든 높은 배움과 지식을 갖춘, 정말이지 이 시대 최고의 인재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그런 뛰어난 인재들이 좁은 공간에서 과도한 경쟁으로 그 체력과 지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은 인류 차원에서 막대한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할 수만 있다면 이들이 세계로 뻗어 나와 새로운 세상을 열어 줄 키(Key)가 되어 주고 인류의 지도자가 되어 주어한다.
한국을 떠나면서 친구들에게 농담처럼 한 말이 있었다. ‘나 없는 한국, 조금이라도 더 넓어진 한국에서 살아봐라!’ 나 하나 떠나 주면 그 만한 공간이 더 생길 것이고 경쟁은 하나 줄 것이 아닌가. 넓은 세상에 나가 한국을 알리고 앞으로 뛰어 나 올 후배들을 위해 길을 개척을 하는 것이 내 임무중 하나라 생각했다. 크게 뗀 걸음은 못 되지만 나를 징검다리 삼아 후배들이 세상 더 멀리, 더 구석까지 진출할 수 있다면 내 한 몫은 한 셈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