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본 미국, 리틀 도쿄(Little Tokyo) 시범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 듣던 말씀이 있었다. ‘제발 아들 덕에 김포공항 구경 한번 가보자.’ 지금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만 90년대 초만 해도 김포공항은 나 같은 촌놈이 함부로 가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끔 TV 드라마를 통해서 보면 성공한 이들이나 드나드는 세상을 향한 게이트였다. 함께 활동하던 분이 일본에 사범으로 갈 일이 생겼다.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겠지만 그 때는 학교강의도 빼먹고 김포공항까지 따라갔다. 환송은 핑계였고 그저 김포공항 방문이 목적이었다. 그때 처음 본 김포공항은 어찌나 신기했던지. 나도 언젠가는 저 게이트를 통해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리라!     
1995년 대학에서 그 흔한 토익, 토플 강좌 하나 안 듣던 내게도 미국 땅을 밟게 될 기회가 생겼다. 내가 속한 시범단이 초청을 받은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의 LA를 간다고 했다. 밤차 타고 서울에 올라가서 미국 대사관 앞에서 새벽부터 줄서 가며 어렵게 받은 비자로 촌놈이 처음 해외여행이란 것을 했다. 처음 본 미국은 신기하기만 했다.
시범 일정을 마치고 나서 LA 다운타운에 있는 유명한 도장을 방문했다. 벽에 걸린 관장님 액션 사진을 보니 어릴 적에 본 영화 포스터 ‘차이나타운(원제:Ninja turf)’이 기억났다. 그 포스터 속의 액션 배우였던 정준 관장님이셨다. 멋진 콧수염과 인상적인 액션장면 때문에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 포스터가 떠올랐다. 그 옆에서 늘씬하게 발차기를 하고 있는 사람 사진은 당시 내가 제일 열광하던 영화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Best of the Best)의 주연 배우 필립 리(Philip Lee) 사범님이었다! 불행히도 두 분 다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
대신 수업 중이던 한국 사범님과 인사를 나누던 중 며칠 후에 일본인 타운인 리틀 도쿄(Little Tokyo)에서 아시아 각계의 무술 고수들이 다 참여 하는 큰 시범경연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서 태권도나 합기도 시범은 보았지만 다른 나라 무술들은 구경하기 힘들던 때였기에 입맛이 당겼지만 귀국 날짜 보다 이틀이나 더 지나서였다. 어떡해서든 보고가야겠다고 맘을 굳혀 먹었다. 몰래 대한항공에 전화를 걸어 귀국 스케줄을 뒤로 사흘을 미루어 놓았다. 귀국하는 날 아침에야 단장님께 난 남았다가 따로 귀국하겠다고 했다. 예상대로 난리가 났다. ‘아니 이 사람이 여기가 어디라고? 자네 돈은 있나? 영어는 할 줄 아나?’ 수중에 남은 50불이 전부였다. 영어는 물론 한마디도 안 통했다. 하지만 어떻게 든 있다 갈 테니 걱정 마시라고 하고 나만 달랑 남았다. 다들 떠나고 나서 시범 다니며 받아두었던 명함들을 꺼내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한 군데에서 잠자리를 신세 지기로 했다. 그리곤 시범경연을 구경하는 날까지 LA시내를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녔다. 배가 고프면 값이 제일 쌓던 바나나를 한 뭉치 사서 옆구리에 끼고 걸어 다니며 까먹었다. 길들은 지평선 너머로 시원스레 뚫려 있었지만 나처럼 걸어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보니 홈리스(Homeless:노숙자)로 보일 수 있던 짓이었다. 
마침내 무술시범경연대회가 열리는 날 리틀 도쿄(Little Tokyo)를 찾아갔다. 행사명은 팬암 아시아 마셜아츠 페스티벌(Pan-Am Asia Martial Arts Festival)이었다. 행사장에 가보니 무대주위를 삥 둘러 빼곡하게 천막들이 쳐있고 각 문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중국의 각종 쿵푸 팀들과 일본의 유술, 검술, 창술, 궁술 등의 무술들 외에 처음 보는 남방 아시아계 무술들도 있었다. 처음 보는 기술들이며 예리한 기합소리, 뛰고 구르는 빼어난 동작들. 그 날 내 눈이 호강을 했다.
하루 종일 벌이는 시범경연 가운데 태권도는 단 한 팀만 초청 되어 있었다. 예사 자리가 아니었다. 각 팀마다 예리하게 다른 팀을 주시하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실력이 밀린다 싶으면 끌끌 혀를 차는 분위기였다.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가자 태권도 쪽 사범님이 나에게 함께 시범을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다. 이런 자리에 낄 수만 있다면 나로선 더 없는 영광이었다. 8명으로 구성된 이 도장 시범단 수준도 상당했다. 1단을 따는 데만 5년이 걸리고 2단은 기약도 없다는 도장이었다. 그러니 절도 있는 파워풀한 동작들이며 깔끔한 실력들이 이미 흠잡을 데가 없었다. 나도 도복을 갈아입고 같이 몸을 풀고 있었는데 한 원로 관장님이 오시더니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아무나 함부로 끼워 주냐며 시범담당 사범님을 나무라셨다. 속으로 서운했지만 행여 폐가 되면 빠지겠다고 했다. 하지만 담당 사범님이 괜찮다고 만류하시는 덕분에 끼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 순서가 되자 다들 시범을 멋지게 해냈다. 역시 뛰어 차고 이어 차며 송판을 부숴 나가는 빠르고 강한 발차기는 어느 무술도 태권도를 따라 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함께 몇 가지 발차기 시범을 보이고 나서 마지막 남은 송판들은 손끝 찌르기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미국 송판은 한국보다 두꺼웠다. 남은 송판이 세 장이었다. 다 겹쳐 잡았다. 담당 사범님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손가락이 부러지면 부러졌지 이런 자리에서 물러 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걱정 마시라고 했다. 야외여서 다소 소란한 분위기였는데 내가 낼 수 있는 발악에 가까운 기합을 최대한 끌어내며 손끝으로 송판을 조준하자 일순간에 정적이 돌았다. ‘설마?’하는 눈치 같았다. 당시에는 손끝격파가 흔한 시범이 아니었다. 최대한 폼을 잡다가 한 걸음 들어가며 찔렀다. '뻑!' 소리를 내며 송판들이 둘로 갈라지고 내 손끝은 보조자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그냥 조용했다. ‘아니 이 정도에 아무 감흥이 없나?’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다른 문파에서도 ‘아니, 저 놈이!’ 하는 눈치였다.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오자 사회를 보던 금발 미인이 뛰어와 손 좀 만져 봐도 되냐며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며 너무 좋아했다. 함께 다정한 포즈로 사진도 찍고 아주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원로 관장님도 잘했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
시범을 마친 후 다른 문파의 천막들을 돌며 기웃거렸더니 째려보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들과 나란히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상대로 인식된 것 같아 기뻤다. 어쨌거나 그 날 하루는 좁았던 식견을 확 넓혀준 값진 경험이 되었다. 역시 강호는 넓고 무술은 끝이 없구나!

애틀랜타 올림픽 파크(Olympic park) 시범
이듬해인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에 맞추어 또 한 번 시범단이 구성되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비자 받기가 매우 까다롭던 때였다. 미국과 인연이 있으려고 했는지 가기로 한 사람들 중 비자를 못 받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생겨 예정에도 없던 내가 또 끼게 되었다. 그러나 부푼 기대와 달리 애틀랜타는 처음 봤던 미국만 못했다. 미국 서부의 이국적인 경치와 다르게 동부지역인 애틀랜타는 기후나 경치도 한국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후에 실패한 올림픽이라는 악평을 듣게 된 애틀랜타 올림픽은 심지어 그곳 주민들조차 언제가 개막식인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올림픽 분위기조차 조성되지 않았었다. 메인 스타디움과 문화행사가 열리는 올림픽 파크가 있는 다운타운을 제외하곤 아무런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올림픽 파크에는 테러방지를 위해 섬찟할 정도로 중무장한 경찰병력들이 까맣게 깔려 위압감을 주고 있어 축제분위기가 위축되어 있었다.
올림픽 파크에서 길거리 시범을 하려던 우리의 시도도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올림픽기간 중엔 어떠한 단체행동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찰 몇이 우리가 기습적인 시범을 할까봐 졸졸 따라 다니는데 여차하면 수갑 채우겠다는 식이었다.
때마침 전국 TV네트워크인 abc 방송 리포터가 도복을 입고 몰려다니는 우릴 보더니 전국 생방송에 오프닝 시범 하나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경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니까 리포터가 경찰을 붙잡고 사정을 했다. 나중에 보니 그 리포터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카메라 앞에서 격파 하나만 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마침내 큐 사인이 들어오고 메인 스튜디오에서 올림픽 현장을 연결한다며 우리 쪽으로 화면이 돌아왔다. 당시 태권도 한마당 장년부 종합격파 우승자였던 김희도 관장님이 짧은 기합과 함께 제자리에서 뛰어 올라 공중 몸돌아 앞차기로 풍선 두 개를 터뜨리는 간단한 시범을 보였다. ‘팡!’ 소리를 내며 풍선이 터지고 착지를 하자 주위에 벌떼 같이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를 했다. 바로 리포터가 고양된 올림픽파크의 축제 분위기를 전하며 약 5분간 생방송이 진행되었다. 방송이 끝나자 우리를 쫓아다니던 경찰들도 박수를 치고 악수를 건네는 등 태도가 바뀌었다. 이때다 싶어 소란 안 피울 테니 시범 한 번만 하자고 했다. 처음엔 미안하지만 안 된다더니 동료 경찰들과 상의를 하고는 그럼 자기들이 지켜 줄 테니까 잠깐만 하라는 것이다. 중무장한 경찰들이 둥그렇게 둘러싸고 즉석 무대를 만들어 주어 호위를 해주는 가운데 시범을 했다. 각국에서 온 관람객들이 환호하며 좋아했다. 모처럼 제대로 된 축제 분위기가 났던 것이었다. 시범 후엔 함께 사진들을 찍고 자기나라 기념품이라며 작은 배지나 소품을 하나씩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국적을 너머 태권도로 하나가 된 자리였다.
그런데 바로 다음 주에 그 곳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2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등 전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방송에서 폭발 현장을 보여주는데 나도 서있던 장소였다.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하니 오싹했다. 그 많은 중무장한 경찰병력들로도 폭탄테러하나를 막지 못한 것을 보니 인류 평화는 무력시위보다 우리 같은 민간 평화사절들이 더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드디어 들이닥친 영어 쓰나미(Tsunami)
영어는 못해도 어떻게 취직자리 하나 정도는 비집고 들어갈 수 있겠지 하던 넉살 좋은 생각은 대학 졸업반이 되면서 깨졌다. 한 대기업 입사시험에 응시를 했다. 30대 1일 넘는 경쟁률에 1차, 2차, 3차 시험이 영어필답, 영어듣기, 영어면접 시험으로 치러졌다. 당연히 미끄러졌다. ‘단기간에 영어를 배워야 산다.’는 결론에 닿았다. ‘어떻게? 영어의 바다에 빠져라!’ 미국으로 가는 거다. 게다가 내 어릴 적 꿈이 바로 국제 태권도 사범이 아니었던가?
애틀랜타 올림픽 때 애틀랜타에서 두 시간 위에 있는 테네시 주의 차타누가라는 도시의 한인교회에 들려 시범을 했었는데 시범을 본 그 교회 부속 한글학교에서 태권도를 가르칠 사범 하나 보내줄 수 없겠냐는 요청을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어렵게 전화번호를 구해 전화를 드렸더니 오면 좋기는 한데 보수를 주기에는 교회의 규모가 너무 작다고 했다. 대신 일자리를 찾아 줄 테니 생활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라지 않았는가? 받아만 주신다면 감사하겠다며 신바람 나서 얼른 가겠다고 결정을 했다. 겨우내 아르바이트를 해서 비행기 표를 마련했다. 미국행을 결정하고서 떠나기 바로 전 주까지 모든 이들에게 비밀로 했었다. ‘써프라이즈(Surprise)~!’ 내 생각대로 모두들 놀라긴 했다. 미국만 가면 영어도 배우고 성공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모든 사람들이 물었다. ‘영어는 지지리도 못하는 게 하필 미국이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