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 (Verdi) 와 바그너 (Wagner) 의 새 시대가 열렸다. 바그너는 성악보다는 관현악에 더 치중하고 라이트모티프 (leitmotif) 를 많이 썼다. 번역하면, 인도하는 테마 (leading or guiding motif) 인데, 극 중의 인물, 사물, 느낌 또는 아이디어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짧게는 한 악기로 두 음, 길게는 관현악으로 몇 분을 연주한다. 베토벤이 쓰던 모티프 (motif) 에서 착상한 것이다. 운명 교향곡에서 처음부터 마지막 악장까지 계속 나오는 ‘따따따 딴’ 같은 것이다.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다.

바그너 오페라의 두 여왕을 소개한다. 노르웨이의 플라그슈타트 (Kirsten Flagstad, 1895-1962) 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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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을 명성 없이 본 고장에서 공연하다가 은퇴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39세에 뉴욕 메트의 초청을 받았다. 첫 날 제1막부터 청중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라디오 중계의 해설을 맡았던 가수 퍼라 (Geraldine Farrar) 는 미리 써 놓았던 노트를 내던지고 “새 스타가 탄생했습니다” 라며 흥분을 했다. 

첫해에 바그너의 오페라 6편을 휩쓸고는 당당히 리먼 (Lilli Lehman) 과 노디카 (Lillian Nordica) 의 후계자가 되었다. 노디카는 지난회에 소개한 시기심이 많은 멜바 (Melba) 한테 바그너의 브린힐데역을 빼았긴 적이 있었다. 화가 나서 메트 오페라를 떠났는데, 멜바는 그 역이 너무 힘에 겨워 도중에 목소리를 잃고 처음으로 무대에서 실수를 했던 것이다.

늦게 핀 꽃이었다. 처음에는 서정적 역을 맡다가, 중후한 베르디의 역으로 전환했으며, 드디어는 바그너의 역을 맡으면서 자신의 목소리의 진가가 있는 곳을 찾게 되었다. 20년이 걸린 것이다. 그동안 목소리가 점점 좋아졌고 성량도 많이 늘게 된 것이다. 현대의 소프라노는 대개 40대, 50대에 와서 절정에 이른다고 한다. 메트 오페라에서 보더라도 르네 플레밍 (Renee Fleming), 수잔 그레이엄 (Susan Graham) 이 모두 50대로 접어 들었다. 

그녀의 대역은 테너 멜키오 (Lauritz Melchior) 였다. 덴마크 출신 멜키오도 바그너 오페라의 제1인자였다. 한번은 브리지 게임을 하다가 그녀의 이야기에 화를 낸 멜키오가 어린애 같이 대꾸를 했다. “앞으로 우리 둘이 같이 공연할 때는 커튼 콜 (curtain call) 에 같이 나가야지, 당신 혼자 나가면 안됩니다.” 그녀는 화가 나서 2년 동안을 말 한마디 안 하면서 같이 공연했다. 

2차 세계 대전중에 남편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후버 대통령의 만류에도 무릅쓰고, 모든 공연을 취소하고 남편한테 갔다. 남편은 사업상 나치와 친해져서 전후에 붙잡혀 재판 도중에 죽었다. 그녀는 히틀러를 만나보기도 했지만 공연을 독일은 피하고 스위스와 스웨덴에서만 4번 했을 뿐인데 나치와 친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래서 남편이 죽고 미국으로 돌아 왔을 때 모두가 백안시했다. 메트 오페라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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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이 지나 빙 (Rudolph Bing) 이 메트 오페라의 매니저가 되자 마자 그녀와 계약을 맺었다.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빙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세론이 무서워 나의 예술적 입장을 바꿀 수 없다. 세계 제1의 오페라 하우스에 세계 제1의 소프라노가 있어야 한다.” 많은 오페라 평론가들도 그녀를 ‘세기의 소프라노’로 쳐 주었다. ‘현대의 카루조’ 라고도 불렀다.

메트 오페라를 떠나고 나서부터는 병원을 자주 드나들다가 1962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유언에 따라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장례식에 들어온 제일 큰 화환은 2년 동안 말도 않던 멜키오가 보낸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음반을 남겼다. 대표적인 음반은 푸르트뱅글러 (Furtwangler) 지휘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인데 예술적 해석 면이나 음성의 완숙도로 보나 제일 잘 녹음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매니저 빙은 그녀의 풍성한 성량을 충분히 담지를 못했다고 서운해 했다. 컴퓨터나 태블렛에서 유튜브 (YouTube) 를 열고 그녀 이름을 찍으면 이 오페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랑의 죽음 (Liebestod) 을 비롯 여러 녹음을 들을 수 있다. 

스웨덴 출신 닐슨 (Birgit Nilsson, 1918-2005) 을 살펴보자.

걷기 전에 노래를 불렀고 꿈에서도 노래를 부르며 자랐다. 그녀의 노래는 티 한점 없이 아름다우면서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그녀의 음성은 온 극장을 꽉 채웠다.

스웨덴에서 시작,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을 거친 후에 이태리의 라 스칼라에서 초청을 받았다. 그것도 일년을 시작하는 첫 공연에 초청받은 것이다. 이태리 출신이 아니고서 일년의 시작 공연에 출연한 가수는 칼라스와 그녀 뿐이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뉴욕에 와서는 바그너 오페라역으로 세계의 제1인자가 되었고 플라그슈타트의 계승자가 되었다. 둘 다 스칸디아비아 출신들이라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을 토대로한 바그너의 오페라를 잘 불렀는지도 모른다.

계약하는데도 명수였다. 제작진과 협상을 하게 되면 목소리를 높이거나 열을 내지 않는다. 이 제안 저 제안을 계속 거절하고 자기 스케줄에 대해서도 애매모호하게 대답한다. 이러기를 계속 하다가 마음에 드는 제안이 나오면 그때서야 “글쎄요” 하고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다. 매니저 빙은 그녀를 다루기가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천만에요. 돈만 넉넉히 넣어 주면 훌륭한 목소리가 술술 나오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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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역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졸데 (Isolde) 는 나를 유명하게 만들었고 투란도 (Turandot) 는 나를 부자가 되게 만들었다” 고 대답했다. 테너 코렐리 (Franco Corelli) 와 투란도를 공연할 때의 일화가 있다. 제2막이다. 둘이서 높은 도 (high C) 즉 오선 밖 위의 첫 도로 길게 끄는 곳이 있는데 누가 더 오래 끌 수 있는지 경쟁을 했다. 코렐리가 젔다. 그는 화가 나서 막간에 매니저 빙 한테 당장 가버리겠다고 했다. 빙은 화가 난 코렐리를 달래면서 제3막에서 그녀와 키스할 때 그녀의 목을 깨물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화가 풀리고 제3막을 끝냈다. 깨물지는 않았지만 이 이야기를 닐슨한테 해 주었다. 그녀는 빙한테 전보를 첬다, “개한테 물려 광견병에 걸려서 공연을 두번 못하겠음.”

닐슨이 아이다 (Aida) 역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그 역을 맡아 왔던 밀라노프 (Zinka Milanov) 는 화가 났다. 어느날 닐슨이 아이다로 공연하고 있을때, 닐슨을 대기하고 있던 롤즈 로이스 (Rolls Royce) 를 강제로 타고 가 버렸다. 나중에 기자들이 묻는 질문에 천연스럽게 “닐슨이 내 롤즈 (roles 즉 역) 를 가로 챘기 때문에 내가 그녀의 롤즈 (Rolls 즉 롤즈 로이스) 를 가로 챘다” 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지휘자와 맞서기를 잘했다. 연습 도중에 숄티 (Solti) 가 좀 천천히 부르라고 제안했다. 공연할 때 훨씬 더 천천히 불렀다. 솔티는 손을 들었고 그 다음 날부터 자신의 속도로 불렀다. 카라얀 (Karajan) 과는 잘 사귀지 못했다. 비엔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습할 때이다. 진주 목거리가 떨어져 풀어졌다. 카라얀이 흩어진 진주를 모아주면서 “뉴욕 메트 오페라에서 엄청나게 받은 돈으로 산 진짜 진주로군요.” 하고 비아냥거렸다. 그녀 왈 “천만에요. 당신들의 비엔나 오페라에서 치사할 정도로 조금 받은 돈으로 산 가짜 진주입니다.” 한번은 카라얀이 공연 계획을 몇 페이지나 되게 전보를 쳤다. 그녀의 답장 전보는 간단했다. ‘비지. 비르짓 (Busy. Birgit)’ 즉 ‘바뻐요. 비르짓 드림.’ 

미국의 모델이며 여배우인 테오발드 (Nell Theobald) 가 9년 동안 닐슨을 괴롭혔다. 영어로 스토크 (stalk) 했다. 공연이 있는 날이면 닐슨 문앞에 빨간 장미를 놔두고, 공연장에서는 검정 드레스를 입고 맨 앞좌석에 앉았다. 여행 중일 때는 같은 비행기로, 어떤 때는 옆 자리에 앉아 다녔으며, 같은 호텔에 투숙했다. 호텔에서는 사진, 옷, 보석, 내의까지 훔쳤다. 드디어는 편지 한장을 남겨 놓고 32세에 자살했다. 편지 내용은 자기 재를 닐슨이 사는 집 정원에 뿌려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녀는 22세에 사자와 같이 광고 사진을 찍다가 발이 물려 25만 불을 받았다. 그 때부터 그 돈을 쓰면서 평생을 짝사랑으로 보낸 것이다. 

닐슨은 2005년 크리스마스에 고향에서 자연사를 했다. 그녀의 유언대로 2008년에 닐슨 재단이 설립되었고 2, 3년에 한번씩 공이 많은 음악가를 뽑았다. 2009년, 첫번 수상자는 도밍고, 2011년 수상자는 지휘자 무티였다. 돈이 남아 돌아가는 사람들 한테 백만불씩 주다니, 쯧쯧. (계속)

사진 설명:  1. 플라그슈타트.   2. 프라그슈타트 얼굴의 돈과 우표.   3. 닐슨과 지휘자 숄티.